20241213#제378차(20241026)경북문경:운달산대승사기행5(끝). 운달산 자락으로 땅거미가 지는 산사의 해는 짧았다. 김용사를 내려서는데 먹물 옷을 입은 순례객들이 합장을 하며 줄지어 들어서고 있었다. 지도상에는 김용사와 대승사가 지척에 있는 것 처럼 보였는데 거리를 가늠해 보니 이십리 7.1km 였다. 차창으로 보이는 과수원에는 사과들이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유럽여행에서 만난 사과축제는 대부분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을 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나라 축제는 가수를 불러이벤트 공연 무대를 꾸미고 사과를 파는 천막에는 능숙한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아름다운 축제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대승사 표지석을 지나 전두리 마을 중턱으로 오르면 붉은 빛을 띤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과수원들이 반겨주었다.
늦가을 바람이 반겨주는 대승사 주차장에 내렸다. 일주문 앞에서 김귀남해설사가 일행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대승사가 있는 사불산(해발912m)공덕봉을 중심으로 부처를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대승사는 김룡사를 창건한 운달조사가 진평왕9년(587)에 개산 했다고도 하고, 이름 모르는 도승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기록에는[삼국유사]사불산굴불산 만불산조에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승사는 조선후기 1,500녕 동안 맥을 이어온 고찰이지만 실상 대부분의 전각들은 현대에 다시 세워져 그다지 고찰다운 맛을 지니고 있지는 못했다. 사불산 봉우리들이 감싸안고 있는 절터는 명당의 기운이 서려 포근함이 느껴졌다.
근래에 들어 국가 예산으로 절집 입장료를 내주면서 생긴 현상이 절집 공사이다. 공사를 자주하면 옛것의 아담한 맛을 잃어 간다. 그런 변화가 아쉽다고 전남구례 답사를 할 때도 임세웅 해설사가 말했다. 대승사도 자본주의 적 가치를 비켜가지 못했다. 대승사는 경사진 곳에 축대를 쌓아 전각을 세웠기 때문에 절에 들어설 때는 자연히 앞산의 산세가 그림처럼 다가오고, 청신한 소나무 향기는 덤으로 다가온다. 대승사 대웅전은 꽃창살이 아름답다. 기단부 면석에 연꽃이 피어있는 형상을 민화처럼 아로새긴 옛 돌이 끼어있어 옛날의 화사했을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미소지었다.
대웅전에 들어서면 정면에 석가여래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거느리고 앉아있는데 뒷쪽에 일반적인 불화대신 화려한 금빛 목각탱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귀남 해설사는 대웅전 앞에서 목각탱에 대한 해설을 이어갔다. 요약하면 길이가4m,폭3m판목 11매를 잇대어 정교하게 조각 되어있었다. 목각후불탱을 둘러싸고 부석사와 소유권 소송이 있었다. 1876년에 작성된 문서에 따르면 목각후불탱은 영주부석사 무량수전에 있던 것인데 1862년 대승사의 법당을 새로 짓고 부석사에서 목각탱을 옮겨왔다. 부석사에서 반환시비가 있어 1876년 부석사 조사전의 수리비용을 대승사에서 대주기로 하고 소송을 마무리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절집도 소송이 있는데, 일반 중생들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진품인가 의심 스러워 마침 지나는 노승에게 물었다. 국보제321호이고 진품이라고 했다. 절집에서 스님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는데, 몇마디 나누고 나니 좋았다. 대승사사방불석과 묘적암 마애여래상은 인연이 닿지 않아 다음 답사로 남기고 버스에 올랐다. 늦가을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느낌으로 대승사를 떠나며 답사를 마무리했다. 동행한 회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늦가을 바람이 반겨주는 대승사 주차장에 내렸다. 일주문 앞에서 김귀남해설사가 일행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대승사가 있는 사불산(해발912m)공덕봉을 중심으로 부처를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대승사는 김룡사를 창건한 운달조사가 진평왕9년(587)에 개산 했다고도 하고, 이름 모르는 도승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기록에는[삼국유사]사불산굴불산 만불산조에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승사는 조선후기 1,500녕 동안 맥을 이어온 고찰이지만 실상 대부분의 전각들은 현대에 다시 세워져 그다지 고찰다운 맛을 지니고 있지는 못했다. 사불산 봉우리들이 감싸안고 있는 절터는 명당의 기운이 서려 포근함이 느껴졌다.
근래에 들어 국가 예산으로 절집 입장료를 내주면서 생긴 현상이 절집 공사이다. 공사를 자주하면 옛것의 아담한 맛을 잃어 간다. 그런 변화가 아쉽다고 전남구례 답사를 할 때도 임세웅 해설사가 말했다. 대승사도 자본주의 적 가치를 비켜가지 못했다. 대승사는 경사진 곳에 축대를 쌓아 전각을 세웠기 때문에 절에 들어설 때는 자연히 앞산의 산세가 그림처럼 다가오고, 청신한 소나무 향기는 덤으로 다가온다. 대승사 대웅전은 꽃창살이 아름답다. 기단부 면석에 연꽃이 피어있는 형상을 민화처럼 아로새긴 옛 돌이 끼어있어 옛날의 화사했을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미소지었다.
대웅전에 들어서면 정면에 석가여래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거느리고 앉아있는데 뒷쪽에 일반적인 불화대신 화려한 금빛 목각탱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귀남 해설사는 대웅전 앞에서 목각탱에 대한 해설을 이어갔다. 요약하면 길이가4m,폭3m판목 11매를 잇대어 정교하게 조각 되어있었다. 목각후불탱을 둘러싸고 부석사와 소유권 소송이 있었다. 1876년에 작성된 문서에 따르면 목각후불탱은 영주부석사 무량수전에 있던 것인데 1862년 대승사의 법당을 새로 짓고 부석사에서 목각탱을 옮겨왔다. 부석사에서 반환시비가 있어 1876년 부석사 조사전의 수리비용을 대승사에서 대주기로 하고 소송을 마무리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절집도 소송이 있는데, 일반 중생들이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진품인가 의심 스러워 마침 지나는 노승에게 물었다. 국보제321호이고 진품이라고 했다. 절집에서 스님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는데, 몇마디 나누고 나니 좋았다. 대승사사방불석과 묘적암 마애여래상은 인연이 닿지 않아 다음 답사로 남기고 버스에 올랐다. 늦가을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느낌으로 대승사를 떠나며 답사를 마무리했다. 동행한 회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김룡사 대웅전앞
대승사 전각배치도
대승사일주문-솟을 대문
대승사 대웅전
사불산공덕봉
대승사대웅전 기단석
대승사 대웅전 면석 연꽃무늬
대웅전 후불목각탱화 [국보제321호]
대승사 만세루
대웅전 주련과 꽃창살
요사채 굴뚝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제991호]
대승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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