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1#제321차강원도철원DMZ''민통선유곡리(평화촌)금강산전기철도교량"기행13.
남방한계선 철책 너머로 북한 오성산이 보였다. 유곡리(통일촌) 마을회관과 북한군 초소와의 거리는 불과 2㎞. 마을 사방에는 모두 군사용 펜스가 둘러쳐져 있다. 유곡리는 남다른 아픈 역사가 숨어 있다. 6·25 전쟁 직전까지 유곡리는 강원도 김화군 근북면에 속한 북한 땅이었다. 하지만 전쟁 때 국군 북진에 따라 유곡리는 남한에 편입됐다. 국군이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가족이 서울 천호동 피난촌으로 강제 이주됐다. 난리 중에 참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인민군이 점령했을 땐 ‘반동’이라고 해서 죽이고, 국군이 점령했을 땐 ‘빨갱이’라고 해서 죽였다. 전쟁은 상처가 깊고 처참하다. 평화가 소중하다.
유곡리 주민들의 한(恨)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1973년 입주 당시 정부에서 토지 원소유자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줄을 그어 나눠주는 바람에 토지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게 됐다. 정부가 입주 시 경작권을 약속해서 삽과 곡괭이만으로 황무지를 일궈내 옥토로 만들었는데 갑자기 원주인이 나타나 내놓으라고 했다. 철의 삼각지에서는 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 국군 9사단과 중공 38군 3개 사단이 12차례 전투를 벌이며 27만여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사상자만 1만 3000여 명에 달했다. 지금은 기념비와 충혼비, 위령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요와 정적만 이어지는 GOP와 남방한계선 철조망을 따라 끓어진 금강산 가던 전기철도교량으로 향했다.
철원역을 출발점으로 종착지인 내금강까지 총연장 116.6km를 1931년에 부설하였다.당시 금강산까지는 4시간 반이 걸렸다. 일제는 창도의 풍부한 지하자원인 유화철을 흥남 경유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주민들의 강제 노력동원과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전기시설로 전환하였다. 이 전철요금은 내금강까지의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인 7원 56전이었다. 일반국민들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민통선 안에 위치하고 있어 군부대의 출입 승인과 인솔자 동행이 필요하다. 인근에 민가가 한채 있었고 휴게소 매점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십자가 달린 교회 첨탑 만이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근에 승리전망대가 있었지만 돼지열병 전염을 예방하기 위해 폐쇄되었다. 도로변 철조망에는'지뢰'표지판이 줄지어 붙어 있었다. 이념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비극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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