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답사기행안내

경남공감09 오지마을을가다-합천나곡마을

옛그늘 2015. 9. 9. 05:22
  1. 【오지마을을 가다】합천 나곡마을

  2. 오지 분위기에 딱 맞는

    묵와고가(默窩古家)가 있는 마을




    파평윤씨 계유정난 피해 은거하면서 유래

    천연기념물 '화양리소나무'로 잘 알려진 나곡마을로 가기 위해 88올림픽 고속도로를 달렸다. 오는 연말 완공을 앞두고 있는 고속도로 직선화·확장공사의 마무리작업이 한창이다. 해인사 나들목에서 묘산 방향으로 이정표를 따라 3.5km 쯤 가면 실개천이 있고 화양리, 묵와고가, 야천신도비, 화양리소나무, 나곡마을 안내판이 반긴다. 항아리 입구 같은 좁은 길로 들어서면 화양마을과 나곡마을로 갈린다. 화양마을 입구에서 산길을 따라가면 나곡마을이다.

    화양마을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합천군 심묘면과 거을산면이 합쳐져 묘산면으로 되기 이전 거을산면에 속해 있었다. 그때 현내면의 나천동과 묵촌동 일부를 병합해서 화양리라 했고 묘산면에 편입했다.

    화양리는 자연마을 화양과 상나곡, 하나곡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이 생긴 것은 540여년 전 파평윤씨 14세손 되는 사람이 세조의 계유정난을 피해 이곳에 은거하면서부터라고 한다.

    화양마을에서 3.5km 정도 떨어진 나곡마을은 본래 '상나'에서 시작해 '하나'로 흘러가는 계곡을 경계로 해서 북쪽은 예전의 현내면이고, 남쪽은 거을산면으로 되어 있던 것이 묘산면 화양리로 병합되었다. 상나마을은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실개천을 경계로 해서 마을이 양분되어 지금도 북쪽은 현내나천, 남쪽은 거을산나천으로도 불린다.




    훈구파 미움 산 박소가 낙향해 학문 전념한 곳

    화양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가면 나곡마을이다. 고개 마루에 야천 박소를 기리는 신도비가 있다. 이곳 양지바른 언덕에 노루오줌꽃이 화원을 이루고 있다. 뿌리에서 노루 오줌냄새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독특한 이름 때문에 만날 때마다 웃음이 나오지만, 연분홍 꽃대에 솜처럼 피어있는 꽃이 매우 아름답다. 인근 묘지에는 분홍색 배롱나무꽃이 불을 지른 것처럼 만발해 있다.

    야천신도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 박소(1493~1534)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박소는 중종 14년(1519)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으나 훈구파의 미움을 사서 1530년 파직당하고 고향인 합천에 내려와 학문에 전념했다. 야천신도비의 비문은 박순이 짓고, 명필 한호 석봉이 글을 써서 1590년(선조 23)에 세웠다. 아래쪽에 박소의 영정이 있는 재실이 있다.

    하나곡마을은 상나곡마을과 화양마을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 갯골이라고도 불린다. 야천신도비에서 그리 멀지 않다. 마을 입구는 축사 뒤편으로 난 좁은 길이다. 길을 따라 들어가 마을 입구에 다다르니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안내문과 시골 풍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쇠줄이 쳐 있다. 몇 가구 되지 않는 시골에서 삭막한 느낌마저 든다.

    마을을 한 바퀴를 돌아보고 나오다 가을배추 모종을 심고 있는 김영순(67) 씨를 만났다. 좁은 마을길 돌담장 곁에는 토마토와 고추가 뙤약볕에 익어가고 있었다.


    "가문만 보고 시집와 울기도 많이 울었어"

    상나곡마을로 가는 길은 승용차 한 대가 겨우 갈 정도로 좁은 길이다. 임도 같은 산길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니 제법 넓은 주차장과 팔각정이 있다. 팔각정에 앉아 있던 오인수 할아버지는 카메라를 들자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자리를 떠버렸다. 고추를 손질하고 있던 진갑련(88) 할머니도 카메라를 완강히 거부했다. 할머니로부터 사연을 들어보니 그동안 여러 방송매체로부터 취재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이 시달림을 받아 불신과 불만이 팽배했다.

    아랫마을에서 축산업을 하고 있는 김영명(62) 이장에게 협조를 구했다. 김 이장을 기다리던 중 인근에 사람소리가 들려 들어가 보니 마당에 돌탑이 군데군데 있다. 개똥쑥을 다듬고 있던 집 주인은 "대구에서 인연 따라 들어왔다"는 것 외엔 말을 아꼈다.

    김 이장과 마을회관으로 가니 오인수(88)·백웅기(78) 할아버지가 회관 앞 정자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김 이장의 설명을 들은 백 할아버지가 마을방송을 하자 밭일하던 주민들이 "뭔 일이냐"며 하나둘 모여들었다. 4남1녀를 모두 키워 외지로 보냈다는 백연희(77) 할머니는 이곳에서 태어나 결혼을 했으니 '원조 토박이'라며 웃었다. 고추를 따다 왔다는 채무자(76) 할머니는 친정이 경북 고령이란다. 당시로서는 노처녀라고 할 수 있는 21살에 가문만 보고 시집을 왔는데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했다.

    상나곡마을에는 지금 8가구에 주민 15명이 살고 있다. 예전엔 물이 좋은 다랑이논에서 벼농사를, 밭에선 고추농사를 짓고 봄이면 산나물을 뜯어 시장에 내다 팔며 소박하게 살았다고 한다.


    '파리장서 사건' 참여한 윤중수 생가 숙박 가능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화양마을 끝자락에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고가가 있다. 솟을대문이 있고 문기둥에 '독립유공자의 집'이란 명패가 달려있다. 1919년 한국유림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 사건'에 참여했던 만송 윤중수의 생가임을 알리는 표지이다.

    조선 인조 때 만송의 10대조 윤사성에 의해 처음 지어졌다고 전한다. 한창 때는 담장 안에 여덟 채의 기와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솟을대문채, 사랑채, 행랑채, 중문채, 안채, 사당채만 남아 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사랑채가 맞는다. 사랑채 처마에 '고요하고 초라한 집'이란 뜻의 '묵와고가(默窩古家)' 현판이 있다.

    사랑채는 마당보다 훨씬 높게 기단을 쌓고 'ㄱ'자형으로 지었는데, 왼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내루(內壘)가 앞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바람이 스쳐가는 내루에 앉으면 자연을 고택으로 끌어들인 집주인의 안목을 느낀다. 사랑채 오른쪽으로 행랑채가 이어지고 거기에 중문이 있어 안마당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집주인을 만나지 못했는데 안채에서 사람소리가 들려 대문을 두드려 인기척을 했더니 안주인 황정아(72) 씨가 반갑게 맞았다.

    고색창연한 안채 부엌을 차실로 꾸며 놓았다. 창살 사이로 사랑채의 고즈넉한 풍경이 들어온다. 안채는 행랑채보다 한 단 높은 기단 위에 'ㄱ'자형으로 앉아 있다.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가 자리한다. 창고와 연결된 통로는 경사로다. 무거운 짐을 나르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라는데 오늘날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엿보게 된다.

    묵와고가를 충분히 느끼려면 하루쯤 묵어가면 좋다. 숙박체험(문화재청 지정)을 운영한다.





    우수혈통 보존 위해

    꽃가루 채취해 유전자은행 보관


    천연기념물 화양리소나무

    상나곡마을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제289호로 지정된 합천 묘산면 화양리 소나무가 있다. 수령 500년 정도로 추정한다.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소나무는 높이 17.7m, 둘레 6.15m에 이른다. 2.5~3.3m 높이에서부터 갈라진 가지가 아래로 처지듯 뻗어있다. 나무껍질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고 가지가 용처럼 휘어져 있어 구룡목(龜龍木)이라고도 부른다.

    연안 김씨의 후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광해군 5년(1613)에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했다는 모함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3족이 멸할 상황에 처하자 김제남의 6촌 되는 사람이 도망 와서 이 나무 밑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이 나무 밑에서 잠을 자던 김제남이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물 길러 가는 꿈을 꾸고 그곳을 파보니 맑은 물이 솟아 그 샘을 '나천'이라 하고 마을명도 '나천'이라 했다고 전한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기고 보호한다. 합천군과 국립산림과학원은 이 나무의 혈통을 이어가기 위해 지난해 꽃가루를 채취해 유전자은행에 보존하고 있다.



    글·사진 심재근 명예기자(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